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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원의 맛과 멋]①산전수전 40년 노조인생…공장 시다에서 노동계 대부로

    기사 작성일 2018-12-31 08:57:25 최종 수정일 2018-12-31 08:5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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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 국회뉴스ON 인터뷰
    생존이 전부였던 평범한 소시민에서 노동투사로 변신

    세 차례 노총 위원장 역임…IMF 시절 총파업 등 주도

    40년 노동운동을 토대로 정치권에서 활발한 의정활동

     

    '생존본능'이 모든 것을 좌우했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만 남은 땅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였다. "우리 집안은 독립운동가 후손이기 때문에 국가가 신경 써준 적이 없어요. 전부 다 조기사망, 행방불명 이랬죠. 최고로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아픈 기억들밖에 없습니다. 허허허." 경북 안동의 빈농 집안에서 10형제 중 셋째로 태어나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국민(초등)학생 때 집안에 있는 마른 고추 한 가마를 몰래 팔아 이를 여비로 무작정 상경, 공장에서 일하던 큰 형 밑에서 시다(보조)일을 배웠다. 그 와중에 운명처럼 만난 은사에게서 도움을 받아 학업을 이어갔고, 당시 최고의 직장이던 은행원이 되어 '소시민'의 삶을 살았다. 이후 우연한 계기로 일절 생각지도 못했던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40년 인생을 바쳤다. 노동운동은 그에게 이데올로기와 철학을 실험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의 '삶 자체'였다.


    "내 좌우명이 뭔지 압니까? (어릴 때는)열심히 해서 사회적으로 출세하면 된다고 생각해 '지네처럼 살자'는 거였어요. 지네는 알에서 깨어나서 수많은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죠. 이런 지네처럼 '열심히 살자'는 게 내 좌우명이었어요. 지금은 '예측가능한 사람이 되자'는 겁니다. 초지일관 스스로 속이지 말고, 방향성을 변질하지 말고, 초심을 잃지 말자는 거예요." 이용득(65·비례대표·초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그의 좌우명처럼 지독하게도 열심히 한길만을 걸었다. 그는 "산전수전 험난한 길을 다 걸었던 노동운동가"라고 자신을 평가한다. 그 결과 그는 노총(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을 세 차례 역임할 만큼 '노동계 대부'가 됐다. 이제는 집권여당의 국회의원으로서 그의 신념을 제도화하는 데 모든 열정을 바치고 있다. 이 의원의 '파란만장했던 40년 노조인생'을 국회뉴스ON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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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5년 7월 7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총파업 전국 노동자 대회'가 끝나고 이용득(오른쪽) 위원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 위원장의 왼쪽은 김성태 한국노총 상임부위원장(현 자유한국당 의원)(사진=의원실 제공)

     

    ◆가난과 싸우며 성장…주변의 도움과 끈기로 어렵사리 마친 학업


    이 의원에게 유년시절의 꿈을 묻자 "생존차원의 생활 외에는 특별한 기억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고작 논 두 마지기를 가진 빈농의 집에 10남매가 함께 살았다. 일찍 철이 든 형과 누나부터 차례대로 학업대신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저는 생존에 급급한 아주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에 유년시절은 아픈 기억들밖에 없어요. 집에서 식구들이 입 하나 더는 게 목적이었죠. 형이나 누나도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서 학업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요. 그러다보니 '나도 공부해야겠다' 또는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나 꿈마저 없었던 시절이었죠."


    이 의원은 11살의 나이에 공장 일을 하던 형, 버스 차장(안내원)을 하던 누나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공장 시다 일을 했다. 공부대신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한 차례 기회가 찾아왔다. 국민학교 재학시절 '전국 어린이 백일장대회' 출전을 위해 서울을 방문했을 당시의 인솔교사를 우연히 길에서 조우한 것이다. 이 의원이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챈 선생님은 자신이 근무하던 동북중학교 장학생 모집 시험응시를 권했고, 이 의원은 3년 장학생이 돼 학업을 이어갔다. "그 선생님이 나를 잘 봐서 저에게 매일 1원씩을 줬어요. 남산시립도서관에 가서 매일 책 한권씩 읽고 독후감을 써내는 숙제를 시킨 거죠. 저를 꽤 가능성 있게 보고 키운 거예요."

     

    이 의원은 중학교 졸업 후 인문계인 경성고로 진학해 학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독일어 시험에서 과락을 받아 1학년을 마치고 장학생에서 탈락하자 또 다시 벽돌공장을 전전했다. 이번에는 평소 다니던 성당의 천주교 수녀님이 상고에 진학해 학업을 이어갈 것을 권유했다. "제가 성당에 다녔는데 한번은 수녀님이 찾아와서 '힐라리오(이 의원 세례명)는 공부를 해야 한다. 고등학교만 나와도 돼. 실업계 나오면 되지 않느냐'고 하시더라고요. 당시 은행원은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상고를 가면 은행을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은행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러니까 나는 그런 기초정보도 없었던 겁니다."

     

    이 의원은 덕수상고로 진학해 주경야독을 한 끝에 한국상업은행(우리은행 전신)에 취업했다. 당시 동기들보다 늦은 22살의 나이로 입사해 바로 군복무를 해야했다. 최전방 군시절은 그에게 또 다른 전환점이 됐다. "유신반대 데모를 한 서울대, 연·고대 학생들이 수배생활을 하다가 붙잡히면 바로 다음날로 최전방입니다. 내 밑에 졸병으로 배치가 됐어요. 그런데 이들을 보면서 '나도 대학이라는 데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데올로기가 뭐고 철학이 뭐고 하는데, 나는 상고밖에 못나와 먹고 사는 게 인생이었죠. 그때부터 인본주의라든가 철학에 나름대로 눈을 뜨게 되는 겁니다. 제대하고 공부해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야간으로 다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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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3월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회관에서 열린 '한국노총 창립 68주년 기념식 및 후원의 날' 행사에서 이용득(오른쪽에서 네번째) 민주당 최고위원 등 내빈들이 떡케이크를 자르고 있다.(사진=뉴시스)

     

    ◆우연히 시작한 노조활동…"1년만 하려 했는데 40년이 됐네요"


    이 의원이 노동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너무나도 솔직했다. 그는 상업은행 본점에 근무하며 야간대학을 다녔고, 고졸 출신 후배들이 그를 무척이나 따랐다고 한다. 당시 그는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고졸자와 대졸자 간 호봉격차를 줄이는 과정에서 어용노조 집행부와 사측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됐다. 그는 노조 불신임투표를 주도했다가 결국 원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사측은 그를 서울 끝자락의 출장소로 부당발령을 냈다. 그는 "은행에서 해고되지 않기 위해서", "다니던 야간대학을 계속 다니기 위해서" 노동운동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부당전보 발령에 의해서 본의 아니게 노조를 하게 되는 겁니다. 노동운동에 대한 어떤 관점이 있고,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단지 공부를 해야 하고, 야간대학에 다녀야 하니까 단지 개인적인 조건 때문에 노조집행부에 출마해 들어온 거예요."

     

    당시만 해도 그는 노동운동·노조활동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몰랐고, 철학적이고 이념적인 배경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1980년에 제가 1년만 노조 상근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그게 40년을 하게 돼요. 계속 노조를 하게 된 이유가 제가 (상업은행·금융노조)노조위원장을 할 때 아주 강성이었거든요. 그때는 제조·운수 노조 정도만 인정할 정도였죠. (사측에서)'네가 임기 마치고 복귀만 해봐라' 하곤 했었어요. 당시에는 안기부(국가정보원 전신)에서 개인사찰도 하고 그랬거든요. 은행이 최고의 직장이었으니까 잘리지 않기 위해 상급단체로, 상급단체로 다닌 거죠."


    이 의원은 노조활동을 하면서 뒤늦게 본격적으로 노동법과 노동운동을 공부해 자신만의 노조관이 형성됐다고 고백했다. "화이트칼라는 보통 노조를 3~6년 하고 복귀해요. 그런데 저는 '도산(도시산업선교)'이라고 하는 영등포산업선교회라는 곳에 다니고, 다락방 서클에도 다니면서 노동운동에 대한 공부를 했어요. 그 당시는 독재정권 시절이었으니까. 그때 같이 공부하고 학습한 동지들이 나중에 민주노총에 들어가 근본자원이 되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지금도 민주노총과도 상당히 가까워요. 지금도 민주노총이 한국노총을 어용이라고 하는데 저하고는 동지로서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용득 의원이 국회의원회관에서 진행한 국회뉴스ON과의 인터뷰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유윤기 촬영관)
    이용득 의원이 국회의원회관에서 진행한 국회뉴스ON과의 인터뷰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유윤기 촬영관)

     

    ◆노조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IMF 구제금융에 맞서 싸운 것

     

    이 의원의 40년 노조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1997년 11월부터 2001년 8월까지 있었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절이다. 그는 당시 금융노조 위원장으로서 IMF의 은행 합병, 금융권 구조조정에 맞서 싸웠다. "그때 IMF에 저항하고 싸운 세력은 금융노조가 유일합니다. 제가 사용자와 투쟁을 했다기보다는 국익을 위해 IMF와 투쟁한 겁니다. 이헌재 전 부총리(IMF 구제금융 당시 금융감독원장·재정경제부장관을 지냄)가 저한테 개인적으로 '이 프로' 하면서 고마워했어요. 왜냐면 정부입장에서 IMF가 무리한 요구를 많이 했거든요. IMF가 무리한 요구를 할 때 이용득 금노위원장이 강하게 싸우니까 우리 정부의 협상력을 제고시키는 원인을 제공한 겁니다. 그러니까 속으로는 저한테 상당히 고마워했죠."

     

    이 의원은 IMF와 우리 정부가 분기별 협상에 들어갈 때마다 협상 장소를 무단점거하고, IMF의 무리한 요구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IMF 측에서 "왜 저 사람을 그냥 놔두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은행은 필수공익사업장으로 파업·투쟁 등 단체행동권이 제한된다. 이 의원은 IMF 시절 금융권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세 차례 주도했고, 이를 이유로 감옥을 두 차례 다녀왔다. 그는 당시 수시로 삭발하고, 단식을 감행하는 한편, 거리투쟁을 주도하면서 '용팔이'란 별명을 얻었다. '노동계의 대부'란 별명 못지 않게 그가 아끼는 애칭이다. 이 의원은 총 세 차례 한국노총 위원장을 지내면서 2011년 말 민주통합당으로의 야권대통합 과정에 합류, 지금까지 노동계와 정치권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용득 의원과의 인터뷰 ②편 계속 됩니다.

     

    '바르고 공정한 국회소식'

    국회뉴스ON 박병탁 기자 ppt@assembl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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