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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남아 있는 모든 것: 죽음이 삶에게 남긴 이야기들

    기사 작성일 2022-03-02 10:41:47 최종 수정일 2022-03-02 10: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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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도서관 금주의 서평]법의학, 죽음과 삶의 가교

     

    "무엇이 그를 자살로 이끌었는지를 추정해보거나 그 결정을 판단하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이름을 돌려줌으로써 그가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줄 수는 있다. 슬픔으로 넋이 나간 가족이 궁금해하는 답을 줄 수 있고, 그의 몸을 가족에게 돌려줄 수 있다. 우리가 전해주는 소식에 가족들이 기뻐할 일은 거의 없지만 친절하고 정직하게 고인을 존중하는 우리의 태도는 가족들이 결국 슬픔을 이기고 치유될 수 있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게 돕는다."(91~92쪽)

     

    죽음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사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죽음의 실체를 온전히 알 수 없다. 매일 죽은 자들을 만나고 죽음이 일어나게 된 방식과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법의학자에게도 이 질문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죽음은 늘 곁에 있기에 친숙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 찾아와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한꺼번에 바꿔놓을 수도 있는 그 무엇이다. 법의학자들은 자신의 앞에 누워있는 시신을 통해 끊임없이 죽음을 느끼고 죽음이 주는 교훈을 통해 성장하는 사람들이므로, 죽음 앞에서 한없이 겸허해지는 동시에 죽음을 깊이 존중한다. 이 책은 영국의 저명한 법의인류학자인 저자가 오랫동안 죽음과 함께 일하며 깨닫게 된 삶의 지혜들을 독자에게 전하는 소박하고 솔직한 언어들의 모음집이다.

     

    첫 장은 저자가 해부학과 첫 만남을 가졌던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정육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몸의 구조를 익히던 시간들을 사랑했으며, 대학에서 첫 해부학실습을 하면서 사람의 해부학이 간직한 아름다움에 강렬하게 매혹되는 과정에 대해 저자는 '죽음의 세상으로 건너가는 다리'로 표현하고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의학도가 있으나, 법의학이라는 특수한 분야의 일을 업으로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과 이유가 존재한다. 그것은 저자처럼 죽은 동물의 신체구조가 담고 있는 논리정연한 자연의 질서가 될 수도 있고, 흥미진진한 법의학 드라마일 수도 있으며, 학창 시절 우연히 청강한 법의학 강연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지난날의 의도적이지 않았던 선택과 경험들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그렇지만 되돌아보면 그 선택과 경험에는 언제나 무의식적인 자신의 성향과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지향해왔으며, 언제나 살아있는 사람보다는 죽은 자들을 마주할 때 더욱 편안함을 느꼈다고 독백하고 있다. 돌이켜볼 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때문에 저자가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자신의 삶의 궤적을 법의인류학의 길을 선택하기 위한 하나의 긴 여정으로 결론지었을 때, 나는 퉁명스러움 속에 다정함을 감춘 듯 보이는 낯선 중년의 백인 여성에게 상당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국제분쟁과 대량재해 현장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책의 후반부에서 나는 공감의 단계를 넘어 저자의 마음에 깊이 이입하게 되었다. 1999년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 사이에 벌어진 참혹한 전투와 민간인에 대한 살상현장을 기소하기 위해 영국 법의학팀은 발칸반도에 위치한 코소보의 작은 마을로 파견되었다. 무더위와 폭발의 위험 속에서 몰살당한 수십 구의 부패한 시신들을 수습하는 일, 시신의 조각 속에서 전쟁범죄 혐의를 뒷받침할 법의학 증거들을 찾아내는 일, 시신의 이름을 밝혀내어 무사히 가족의 품에 돌려주는 일, 정치인과 언론매체의 관심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시신의 존엄성을 지켜내는 일, 이것은 유일하게 법의학이 담당할 수 있는 영역이고, 법의학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 가운데 가장 가치로운 일일 것이다. 저자가 코소보에서, 인도양 쓰나미 현장에서 겪은 일들을 담담히 이야기할 때 나의 마음속에도 서늘한 바람이 스쳐갔다. 2014년 세월호 침몰사건이 일어났던 진도 팽목항의 컨테이너 사무실, 어둠 속에 무심하게 굽이치던 파도와 모래바람에 펄럭이던 하얀 천막도 떠올랐다.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도 법의학자는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나 자신에게도 그러했듯 한 법의학자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저자는 장의 말미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발칸전쟁처럼 세계를 바꾼 사건이 자기 자신의 경험이 되면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 남는다. 어떤 사람이 되건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절대로 그전과는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실종된 민간인을 찾기 위해 묘지를 발굴하고 발굴된 고대 유골의 얼굴을 복원하며 경찰을 대상으로 재난피해자 신원확인 훈련프로그램을 만들어 교육에도 앞장서는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하는 저자의 모습을 보며 한편 부러움을 느꼈다. 유명 범죄소설 작가들과 함께 100만 파운드 모금운동을 벌여 대학교에 새로운 시체보관소를 만든 성공사례는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국은 이미 1800년대에 검시관법이 제정되고 검시업무의 전문성과 독립성이 보장되는 영미법계 검시관제도의 기원이 된 나라이다. 죽음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으며 망자의 권리를 살아있는 자의 그것과 동등하게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유구한 전통과 문화의 산물일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법의학은 비록 짧은 역사를 갖고 있지만 법의학의 학문적 중요성을 인식한 선구자들의 헌신에 의해 척박한 대지에 꽃이 피듯 현재의 성과를 이루어냈고, 이제 우리 사회는 사회구성원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방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법의학이 발전할수록 정의롭고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줄 것이란 믿음이 나에게는 있다.

     

    나는 오래된 친구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이야기 나누는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다. 우리는 법의학이라는 좁디좁은 영역 안에서 비슷한 경험과 감정을 겪으며 성장했고, 같은 생각을 하며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책의 마지막에 적은 소원대로 그녀가 죽은 후에 자신이 일하는 학교의 시체보관소에 기증될 수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어디까지나 법의학의 관점에서, 그것은 학생을 가르치는 법의인류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인 것이다.

     

    저자: 수 블랙(법의인류학자)
    역자: 김소정
    출판사: 밤의책
    출판일: 2021.10.
    쪽수: 532
    서평자: 정하린(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함께 읽으면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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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몽 지음 / 수사연구사, 2012 / 313쪽

     

    지은이:  유성호
옮긴이: 이창신21세기북스, 2019
277 p.
    유성호 지음 / 이창신 옮김 / 21세기북스, 2019 /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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